No. 25 | 백업

  그것은 도대체 몇 번째 슬픔의 도시였을까. 태어나서부터 줄곧, 슬픔의 도시만을 통과해온 느낌이었다. 어째서 이렇게 번번이, 먼 길을 힘겹게 걸어 도달하는 곳이 슬픔의 도시들인지, 나는 잘 알 수가 없었다. 길을 걸을 떄면 어디에라도 서둘러 도착하고 싶어진다. 도착만 하면, 이번에는 좀 더 나은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예상은 언제나 빗나갔다. 어디에 정착할 것인가,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들은 어느 순간 내 눈앞에 나타나서, 기다렸다는 듯이 스윽, 하고 나를 끌어들인다. 나는 그저 빨려 들어갈 뿐이다. 오랜 여행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있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이번에는 나을 수도 있어, 하고 도시가 나를 끌어가는 대로 맡겨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좀더 나은 곳까지 가고 싶다. 제대로 된 곳에서 살고 싶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길을 걷는다. 이 길은 지독히 단조롭다. 나무도 풀도 꽃도 새도 강도 산도 없다.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눈을 들면 저기 먼 곳에, 아득한 지평선이 열려 있을 뿐이다. 나는 앞을 볼 수 없는 험한 산속을 헤매어보기도 했지만, 그때도 지금만큼 절망적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험한 산을 헤집고 나가면 편안한 길이 다시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설혹 내가 저 지평선까지 걸어갈 수 있다 해도,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전에 나는 지쳐 쓰러져버릴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아픈 다리를 참으며 계속 걷고 있는가. 이 세상에 기쁨의 도시 따위는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 기쁨의 도시는커녕, 슬픔의 도시조차 보이지 않는 이 망망한 길을, 왜 걷고 있는가.

  / 황경신,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다> 
관리자예리

05.12 | 00:03
그리고 이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만, 로그 게시판에 이모티콘을 추가했어요.

#좋아하는_책의_좋아하는_문장
몽시

05.12 | 01:16
나 요즘 황경신 작가님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해
그리고 예리 갠홈이 후와후와해졌어 예쁘다 이모티콘도 써야지

관리자예리

05.12 | 01:23
후후 귀엽지
화가나요. 도 있지만 화가 나지 않으니 쓰지 않습니다.

황경신 작가님 책 제발 읽어줘
초콜릿 우체국(위의 단편이 실린 책)은 개정판도 나왓어요
전자책도 있어요
제발

◆ COMMENT ◆

No. 2 | 백업

  “박사님은 무척이나 간단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저로선 이 모든 일이 정말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인지 아직도 잘 믿어지지가 않아요.”

  글로리아나가 말했다.

  “따지고 보면 뭐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지구와 달이 가장 가깝게 있을 때, 둘 사이의 거리는 대략 35만 킬로미터 정도입니다. 그 정도면 우리 인간만 해도 평생 이리저리 오가다 보면 충분히 움직이는 거리입니다. 물론 단숨에 그만큼 여행하는 경우는 없겠지만요. 사실 거리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계획을 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지구를 떠나 우주를 여행해 달까지 간다는 사실이니까요. 엄격하게 말하자면 달도 지구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가본 적이 없지만 말입니다. 달은 지구의 꼬마 여동생 격이죠. 지금 이 둘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짧은 거리를 여행한다는 사실에 그렇게 놀라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은 사실 이보다 훨씬 더 경이로운 업적을 많이 이루어왔으니까요.”

  코킨츠가 말했다.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글로리아나가 물었다.

  “가령…….”

  코킨츠 박사가 말했다.

  “글쓰기를 예로 들 수 있겠죠. 한 사람의 머릿속에 형체도 없이 존재하는 어떤 생각을, 우리가 글자라고 부르는 일련의 상징들을 이용해 다른 사람의 머릿속으로 전달하는 능력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달에 로켓을 보내는 것보다도 더욱 경이로운 업적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능력이 워낙 보편화된 탓에 아무도 경이롭게 생각하지 않죠. 마찬가지로 달 여행이 보편화되고 나면, 그때 가서 우리는 어째서 이렇게 간단한 일을 사상 최초로 성공했다며 그토록 난리법석을 떨었는지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하게 될 겁니다.”

  / 레너드 위벌리,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달나라 정복기> 
관리자예리

02.20 | 04:19
 “그런 말은 하지 마.”

 빈센트가 말했다.

 “무슨 말?”

 신시아가 말했다.

 “날 영영 다시 못 보게 될 거라는 이야기 말이야. 물론 정말로 그렇게 될까 봐 그러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너를 다시 못 보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나니까. 차라리 죽는 거야 겁날 것도 없지. 하지만 죽으면 결국 너를 볼 수 없게 된다고 생각하면…… 그러면 또 덜컥 겁이 나.”

#좋아하는_책의_좋아하는_문장

◆ COMMENT ◆